초 상 - 추억이 깃든 나의 그림
"인물이 가장 어렵고 산수가 다음이고 화훼가 그 다음이다. 귀신그리기가 제일 쉽다."
옛 화론에 나오는 이야기다. 풀어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 형상이 일정치 않은 귀신이나 도깨비는 작가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그러면 반대로 인물화는 어떨까? 동양미술에서는 인물화의 까다로움이 대단하다. 특히 임금의 초상인 어진이 그렇다. 대상의 크기나 비례는 물론 안면의 주름이나 근육을 살펴야하고 모발이나 수염의 숫자까지 헤아려야했다. 임금이 오랫동안 전속모델처럼 시간을 많이 할애해주지 않을 뿐더러 많은 심사위원들이 그림의 잘잘못을 따지니 웬만한 화사로선 꿈도 꾸지 못할 자리였다.오직 당대 제일의 화가들만이 이 영광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상좌, 변상벽, 조영석, 김홍도, 김은호 등이 어용화사로서 화명을 떨친 이들이다.
이 그림은 근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초상'이라는 작업 중 하나다. 많은 경우 특정한 대상을 그리지만 전혀 엉뚱한 초상으로 변해 버리는 때가 있는가 하면 자화상처럼 변할 때도 있다. 그 때 그 때 생각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고 붓과 먹이 가지는 순간성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목구비가 있고 얼추 사람 모습같아 인물 그림에 가깝지만 형상이 자유롭다는 면에서 귀신그림에 가깝다.
그러나 그림이 가지는 자율성은 그림의 기본조건이라는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 아래서도 방해받지 않도록 조율해 본다. 그리고 이 그림들을 지지하는 기본틀이 무엇인가를 곰곰 반문해 본다. 내용과 형식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 과연 그 관계설정이 올바른가? 그림이 가지는, 또는 그리고자 했던 의미는 충분히 표현되고 전달되는가? 어떠한 모습속에서 나늘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과거에 인물 그림이 전신( ) 이었다면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인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항상 복합적이고 함축적이며 명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인물 그림과 귀신 그림 사이 그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확연한 느낌을 가져본다.
일간 스포츠 (1998년 3월 10일 )